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중 디아누스(야누스)의 일기를 읽고 + 책 속 좋은 문장들과 함께

마찬가지로 나는 철학적 사색이 어떻게 해서 핵심을 빗나가는지 역시 알고 있다. 그것은 - 사전에 정해진 또 다른 목표에 의거해 스스로를 규정하는 - 제한된 목표만으로는, 요컨대 욕망의 목표에 반하여 단순한 무관심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 목표만 가지고서는 기대에 결코 부응할 수 없기에 초래되는 현상이다


모든 이해력이 와해되는 한계상황에서 살아갈 자유가 아닌 이상, 자유는 아무것도 아니다


언젠가 나는 이 세상을 버릴 것이다. 그때 비로소 밤은 밤이 되고,  나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밤을 향한 삶의 사랑이다. 내 삶이, 그나마 필요한 힘이 남아 있어,  자신을 밤으로 이끌어갈 대상에 기대를 품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서 괜한 고생을 한다. 밤 자체가 자신을 사랑할 힘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계속 살아남을 경우, 밤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힘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명징함은 욕망을 배제한다


현재 내 안에서 고개 드는 질문 중 삶과 삶의 불가능성이 서로에게 던지지 않은 질문 또한 하나도 없다.


세계를 정의할 유일한 방법은 먼저 그것을 우리만의 척도로 환원한 다음 그것이 정확히 우리의 척도를 벗어나 있음을 활짝 웃는 낯으로 재발견하는 데 있다.


내 안에 제어할 수 없는 힘의 요동을 현기증 나게 느끼면서, 어떻게 반항하고, 저주하려는 욕망을 떨치겠는가? 한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어떻게든 한계를 부과하고픈 유혹을 어떻게 참아내겠는가? 나를 죽이려드는 힘의 요동이 멈춰지기를 내 안의 모든 것이 요구한다는 생각과 더불어,  어떻게 나는 쓰러지지 않고 버틸  것인가?


무기력만이 잔인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죽음과 그로 인한 삶의 무한한 재생을 우리는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궁극의 행복은 그 지속을 내가 의심하는 바로 그 순간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양면적인 상태 속에서만 정신 차려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불행과 쾌락 사이에 극명한 차이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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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인 쥐이야기처럼 이 이야기도 참 무어라 말하기 어려움이 있다.
아무래도 2부의 주인공은 1부의 A라고 추측이 되는데 그래도 내 이해의 폭 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2부까지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정말 야하다 들었던 바타유의 문학작품이 맞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솔직히 야하지 않다.
다만 1부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2부의 주인공 역시 어마어마하게 고뇌한다는 것인데 정말 신기한 것은 내용은 요새 유행하는 '힐링'과 전혀 동떨어져 있는데도 주인공의 고뇌에 집중하다 보면 묘하게 힐링이 된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범인인 나는 범접할 수 없는 깊은 고뇌들에 빠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의 효과일까.
바타유의 고뇌를 무슨 뜻일까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벌써 역설의 철학을 하리라 결심한 것 답게 보통 사람들의 '상식' 묘하게 상충되는 문장들에서 그 수많은 고뇌들 어쩌면 순간적인 죽음과 같은 순간들이 다시 삶을 살아내기 위한 짜냄 같다는 느낌이 든다.
시로 이루어져 있다는 마지막 3부를 남겨두고 슬쩍 엿본 바로는 앞의 1부와 2부보다는 수월하게 읽힐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빌린 도서라 내일 반납해야 하므로.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중 쥐이야기를 다 보고 나서

후반부로 갈수록 더 이해되고 이야기 자체의 완결성이 느껴질거라 믿고 읽어 나갔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나'와 B 그리고 A의 얘기들이 부각되며 이해에 도움을 주던 선언과도 같은 문장들보다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 서사들만 남아서 결국 '나는 이 이야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해야되는걸까'라는 의문만 남았다.
나머지 2부, 3부도 이렇게 읽고 나서 붕 뜬 느낌이 들까 두렵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싶은 마음조차 붕 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읽기로 마음 먹었으니 다 읽어야지.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에 침전되어 있는 아름다운 문장들

삶이란 항상 언어보다 더 변화무쌍하다


내가 최고만 못하다는 생각이 창피하다. 그 생각 자체를 접든지, 남들이 내게 무관심 하다는걸 잊을 정도로

- 최고에 대한 집착이 지우는 사실들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이상한 것은, 악덕이 직면하는 난관이 - 악덕의 규제,  마비 상태 - 현실적 가능성의 비루함이랄지, 무기력 상태에서 연유한다는 사실이다.

- 이 시대의 질병인 무기력을 뚫는 방법은 어쩌면 위악일 것이다.
악덕을 끝까지 밀어 부칠만큼 모질고 독한 인간들이 생각나지 않기에 악덕에 접근하려면 위악이라도 해야하기 때문에


사고 즉 철학은, 불꽃의 극점에서 불어 끈 촛불처럼, 그런 작열의 끝에 거하는 법이다

- 바타유가 왜 그리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알게 하는 문장이다.
어쩌면 그와 그의 여인들이 끝내는 불화 했던 것이 그가 사유하기 위해 여인들과 극점 너머로 가지 않고 불어 껐음이 아닐까?


나는 죽어 있지 않은 나 자신이 개탄스럽다.  몸과 지성,  마음을 고갈시킴과 동시에 격렬한 쾌락,  극단적인 대담성으로 치닫다 보면 거의 생존 자체가 파기되는 법. 적어도 그것은 삶의 휴식을 몰아낸다.


나는 완전연소의 조건 하에서만 살고 싶다

- 두철수에 소개된 문장
  하,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불안에 허덕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일 뿐이다.

- 어째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 불안에 허덕이고 죽음을 두려워할까.
그런 삶은 죽음과 같다 말함이리라.


절실하던 시점에 불현듯 도달하고는, 잃어버린 어느 순간을 찾는다며 남은 인생을 소모한다. 하지만 찾다 보면 멀어지기 마련이라는 바로 그 이치에 따라, 우린 또 얼마나 자주 그 순간을 놓치고 마는가!

- 삶의 어리석음을 후벼 파는 이 문장은 또 찾으려하면, 즉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면 멀어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진실이다.


달 밝은 밤, 부상자들이 울부짖는 들판 위를 부엉이가 비행한다.
그렇게, 나는 한밤중 나 자신의 불행 위를 날아다닌다.


E의 알몸이여ㆍㆍㆍ B의 알몸이여,  이 몸을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려오?
아니지ㆍㆍㆍ
ㆍㆍㆍ내게 더 많은 불안을 주시구려ㆍㆍㆍ.


극단적인 헌신은 신앙에 반하고, 극단적인 악덕은 쾌락에 반한다.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부족한 집중력으로 인해 생기는 틈으로 쓴다.
이 책은 앞서 읽었던 에로스의 눈물이나 아직 다 읽지 못한 저주의 몫에 비해 매우 어렵다.
아마 두철수에서 언급 했듯 우리의 인식 바깥을 사유하고자 했던 철학자이기에 문체마저 그러하고자 했고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이 난해한 문체이리라
언젠가 니체를 읽어보고자 다짐하는 요새는 아니지만 이해의 부지깽이도 없던 시절 니체조차도 떠돌아 다니는 단편들을 보고 얼마나 냉소했던가.
책을 읽기 전 가장 큰 착각이 문학이기에 이해하지는 못해도 감각할 수 있을거란 오판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명멸하는 이 작품은 엷은 배경색이 아니더라도 내러티브 상 왜 들어오는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의 침입이 읽기를 매우 괴롭힌다.
하지만 중간중간 어디에서도 본거 같단 느낌이 들지 않는 매혹적인 문장들은 독자들을 괴로움에서 건져냈다 담구었다가를 반복한다.
완독을 다짐하며 이만 줄인다.





시작 - 조르주 바타유, 저주의 몫

시작

내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 두철수를 들은지 얼마나 됬는지 모르겠다.
짧지만 부득이하게 들을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끝도 없이 들었었다.
청각이라는 한가지 감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진 결과로 더 이상 집중할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습관이 된 청취에 괴로우나 대안을 찾지 못하던 중 글을 어렵게 쓰는 어느 철학자의 책을 읽기 어려운 것은 책을 읽는 이들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사실 이렇게 책 읽기를 시도하기 전에는 미친 듯이 영화를 보았었다.
좋은 영화가 주는 순간적인 만족감은 삶의 고민들을 순식간에 치워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해방감이라는 것은 너무 순간적이었기에 다시 들어오는 삶의 불안과 무력감은 더욱 메아리 쳐질 뿐이었다.
게다가 영화라는 매체는 참으로 무섭다.
시각만을 사용하는 책과 청각만을 사용하는 라디오와 달리 시각과 청각 모두를 장악하는 영화라는 매체는 너무나도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아마 보다 많은 감각을 장악하는 매체가 매력적인 것은 현실과 더 닮았음이리라.
하지만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영화라는 매체를 본 관객들은 하고 싶어도 바로 영화의 생산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대화에서 들어 주는 것은 미덕이라 여겨지나 영원히 듣기만 해야 하는 사람은 얼마나 괴로운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영화를 끊고 책에서 넘어가야 겠다는 다짐과 함께 책을 잡았으나 쉽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라도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생각보다 읽고자 한 책들은 너무 어려웠고 글은 또 어디에 쓸 것인가?
만약 그저 잡히는 종이에 적고 내가 삼킬 것이라면, 교통되지 않는 이 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렇다. 나는 조급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릴때부터 조급하였다. 그와 반대로 몸은 우유부단 하여서 이 분열은 오랜 기간 동안 나를 괴롭혔다. 마침내 자유가 주어졌을 때 해방된 조급함은 나를 불안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은 것이다.
글을 쓰는 이 순간 어느정도의 해방감을 다시 느낀다. 그리고 다시 다짐한다. 실패에 좌절하더라도 다시 매일 쓰고 매일 읽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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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 저주의 몫

아직도 다 읽지 못하였기에 후에 저주의 몫에 대해 또 써야하겠다.

먼저 저주의 몫을 읽기 전에 실은 에로스의 눈물을 읽었었다.
에로스의 눈물은 저주의 몫에 비하면 아주 감각적인 책이었다.
두철수를 통해 들은 바타유의 이미지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주의 몫은 읽다보면 마르크스가 떠오를 정도로 에로스의 눈물과는 다르게 계급을 말한다.
에로스의 눈물에서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 여러번에 걸쳐 필요성을 역설하기는 했었어도 계급투쟁을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바타유가 이 책에서 강조 하는 소모의 개념은 매우 흥미롭다.
생산에 사용 되기 위해 행해지는 것은 '소비'
생산과 아무 상관 없이 행해지는 것을 '소모' 라고 규정하는 바타유는 성장에 한계에 도달해 잉여가 넘쳐나는 사회는 잉여를 소모해내지 못하면 그 잉여로 인해 파멸할 것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책에서는 그 대표적인 예로 세계대전을 들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현대 세계, 특히 한국은 잉여가 넘치는 사회이다.
바타유는 이 책에서 잉여를 소모하는 대표적인 형식 중에 하나로 종교를 들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교회와 절의 숫자를 보면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외국인이 한국인에게 '한국에는 왜 이렇게 교회가 많아요?'라고 물었다는 얘기는 누구나 한번 쯤 들어봤을 것이다.
바타유는 종교활동이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소모형태의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그 교회가 이렇게 넘쳐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잉여가 매우 많다는 것으로 등치시킬 수 있음이다.(돈을 투자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이득도 주지 않을 교회를 짓고 교회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그 많은 비용은 대체 어디서 오는걸까라는 생각을 했을때 이해 할수 있었다.)

바타유의 흥미로운 '소모' 의 개념 외에도 재밌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사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다.
바타유에 의하면 소모의 한 형태인 사치는 귀족들이 재물과 명예를 바꾸는 행위인데 부르주아 사회가 도래하면서 더 이상 명예를 찾지 않는 상류층인 부르주아들은 '희생제의'로 대표되는 사회적 소모행위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을 때 막스베버가 말한 천민자본주의의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다.
과거 귀족들은 현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처럼 효율적이지는 못했을지언정 명예로웠다는 해석은 효율성으로 대표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얼마나 역설적인가!

놀라운 현상으로서 많은 이들이 주목한 포틀래치 같은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바타유는 라마교(티베트 불교)를 언급하며 한걸음 더 나아간다. 당시 어림 잡아 전체 인구의 15%~20%를 차지하던 티베트 불교(신자가 아니라 승려의 수이다)가 얼마나 그들을 떠받치는 노동자들을 얼마나행복하게 하였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소모의 한 형태로써의 종교를 긍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현대에 종교가 과연 보편적으로 노동자들을 행복도에 기여하는 가에 대한 의문과 함께 한국 사회로 본다면 이 역할은 예술가들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주의 몫은 과거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 시간 순대로 분석을 진행하므로 아직 다 읽지 못하고 남은 부분인 4부와 5부는 더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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